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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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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崔益鉉) 선생
1833. 12. 5~1907. 1. 1
․1905년 을사오적 처단 상소
․1906년 호남의병 기의, 일본 대마도 유배
․1907년 일본 대마도 순국
․196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진충보국(盡忠報國)하였던 분으로서 국국의병항쟁의 불씨를 점화시켰을 뿐 아니라 「나라가 흥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데 있으며 국권없이는 모든것을 잃는다」는 진리를 가르쳐 일제 강점기의 민족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되었다. 1907년 1월 7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사상을 자주적인 민족주의 사상으로 체계화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抱川郡) 가범리(嘉范里)에서 대(岱)의 둘재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字)는 찬겸(贊謙)이며 호(號)는 면암(勉庵)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초명(初名)을 기남(奇男)이라고 하였다.
면암은 집안이 가난하여 4세때 단양(丹陽)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지방으로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다.
14세때에 부친의 명에 따라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華西) 이항노(李恒老)의 문인이 되어, 우국애민(憂國愛民)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 받아 그것을 위국여가적(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23세 때에 명경과(明經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화서(華西) 이항노(李恒老) 계열의 위정척사였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王道政治) 구현을 이상으로 하였다.
구국(救國)의 대의를 천명, 자주적 민족주의운동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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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국가보훈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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