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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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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哉 신석구(申錫九) 선생
1875. 5. 3~1950. 10. 10
․1907. 종교를 통한 국민계몽운동으로 국권회복 노력
․1919. 민족대표 33인 중 1인
․1937. 천안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투옥
․1945. 대동아전쟁 전승기원 예배 및 일장기 게양 거부 등으로 투옥
나는 한일합병에 반대한다. 조선사람 치고는 누구나 다 한가지 아니겠는가 일본사람이 조선사람이 되어보면 또한 재판장이 지금 나의 처지가 되더라도 그러할 것이다. 독립사상은 합병당초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내 가슴속에서 사무쳐 있다.
- 선생의 공판기록 중 진술내용 -
선생은 1875년 5월 3일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평산 신씨(平山申氏) 재기(在綺)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은재(殷哉) 또는 춘정(春汀)이다.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5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때문에 선생은 평생 조실부모하여 부모님을 봉양하지 못한 것을 가장 원통해 하였다.
유가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문을 수학한 선생은 20대 초반 서울에서 군수 자제를 가르치기도 하였고, 이후 농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국의 현실은 선생을 거기에 안주하게 하지 않았다.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침탈 앞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진 나라의 운명을 보면서 선생은 국민된 한 사람으로서 의무를 자각하게 된 것이다. 특히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은 선생에게 국망(國亡)의 위기를 절감하게 하였다.
구국의 방도로서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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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국가보훈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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