雙公 정이형(鄭伊衡) 선생
1897. 9. 16~1956. 12. 10
․1921. 선룡사립보통학교를 설립하고 민족 교육 실시
․1922. 대한통의부에서 무장항일투쟁 전개
․1925. 정의부 의용군 중대장
평안북도 일경주재소 5개소 습격
․1927. 고려혁명당 중앙위원으로 활약 중 피체
․1928. 무기 징역을 받고 옥고 중 광복으로 출옥
비로소 인정풍속이 다른 만리 타국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나서 장탄일호(長嘆一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는 이렇게 쓸쓸한 곳을 급급히 찾아 왔을까. 집에 있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처자들은 다 어찌될까. 나의 앞날은 고생이 어떠할까. 망국 민족으로 태어난 것이 죄이런가
- 정이형 회고록 중에서 -
선생은 1897년 9월 16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화하리(化下里)에서 아버지 정효기(鄭孝基)와 어미니 수원 백씨(水原白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하동(河東)이고, 호는 쌍공(雙公)이며, 본명은 원흠(元欽)이나 이명인 이형(伊衡)으로 더잘 알려져 있다.
재산이 넉넉하고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던 부친의 덕택으로 선생은 어려서부터 독선생(獨先生)을 모시고 한학을 배웠다. 특히 선생에게 한학을 가르쳐준 사람은 김평식(金平植)이었는데, 그는 평북 의주 출신으로 후일 만주로 망명하여 대동향약(大東鄕約)을 운영하다가 3․1운동 이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군부(義軍府)등 복벽주의(復辟主義) 독립군 단체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선생은 그로부터 한학과 더불어 복벽적 항일의식을 전수받았다. 하지만 선생은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근대적 민족의식을 수용하였다. 그것은 한말 계몽운동 단체인 서북학회(西北學會) 회원으로 활동하고,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는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제공하였던 선생의 친형 정원익의 영향때문이기도 하였다.
선룡사립보통학교 설립, 민족 교육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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