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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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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曺晩植) 선생
1883. 21.~1950년
․1919년 평남강서 3․1독립만세 운동 지도자
․1920년 조선물산장려회 조직(평양)
․1927년 신간회 중앙 집행위원 및 평양지회장
․1945. 11월 조선민주당 창당
․1970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민족의 사표(師表)로서 그의 열렬한 애국정신과 숭고한 독립정신은 이 시대를 사는 후손들의 참 귀감이 되고 있다. 일제하에서 선각의 교육자요 국산품애용의 열렬한 실천자였으며, 광복후 반탁운동과 민족자주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平南江西에서 출생
선생은 1883년 2월 1일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에서 엄친 창녕조씨(昌寧曺氏) 경학(景學)과 자친 경주 김씨 경건(敬虔) 사이에서 외아들로 출생했다. 선생은 7세 때에 한문공부를 시작해 10년에 걸쳐 사서삼셩 등 기초과정을 배웠다.
15세 때부터 평양에서 포목상과 지물상을 경영하며 가계를 꾸려온 선생은 5척단구의 이름난 술꾼이었다. 그러다가 서당의 동기선생인 한정교(韓鼎敎)의 인도를 받아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한 후 새학문에 대한 동경이 불같이 일어나서 23세의 만학으로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했다. 1906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먼저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고 1910년 명치대학 전문부 법학부(明治大學專門部法學部)에 입학했다.
五山學校에서 후진 양성에 헌신, 사치와 허영을 배척
1913년 명치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한 선생은 남강 이승훈(南崗李昇薰)의 초청으로 민족교육의 요람인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동경에서 견문을 넓히고 또한 세계 속의 조선을 바라보며 교육의 방향과 포부를 가졌던 이념과 선구자적교육을 인정받아 2년 후에는 교장으로 승진하게 되었으며 사감을 겸하여 주야 24시간을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했다. 선생의 풍모는 매우 독특해서 5척단구에 머리를 빡빡 깎아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갓신을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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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국가보훈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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