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욕생활이 초래한 변태적 행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제한하는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된다. 그중 “장미의 이름으로”에서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큰 힘인 “성의 욕구”라는 것의 억제를 통한 깨달음 - 즉 수도생활을 가용하는 데서 엿볼수 있다.
금욕생활 속에서의 자신의 절제와 이기적인 욕망의 변화, 절대적 진리에 따른 고행 속에서의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방황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
물론 금욕생활을 통해서 자기 성찰과 진리탐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표출하지 못하는 경우, 그 반응들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 중 소위 변태적이라 하는 비정상적 행위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 생각되어진다.
즉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금기시킴으로써 그에 반향하여 나타나는 욕구 충족의 한 형태인 것이다.
그의 예로서 동성애가 있을 수 있다.
여자를 사악한 동물로 보아 가까이 하는 것도 금기시하는 수도생활속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 어찌보면 그저 욕망의 충족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 같은 성(性)의 남자를 상대로 삼아 표출하는 남색의 경우이다.
물론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는 것 뿐이다.
이걸 “죄”라는 굴레에 씌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사랑일 경우에는 말이다. 그러나 그 동성애가 그저 한 순간의 욕망의 탈출의 요구로 여겨질 때, 그리고 그렇게 사용될 때, 동성애는 아름답거나 혹은 애처로운 사랑의 한 종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수도원에서의 비정상적인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극단적인 고행을 통한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갈등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옛날 우리 조상들에게서도 이런 예는 보여진다.
비종교적이지만, 남색의 예를 들자면 남사당패가 있고, 종교적인 예이지만, 이성간의 잘못된 성관 계를 논하자면 불당의 스님들을 그 예로 들어볼 수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남사당패에는 여인네가 들어올 수 없다는 rule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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