孟子의 人性觀
9 2 3 8 0 1 강 동 현
맹자(B. C.372~B. C.289)는 공자 사후 약 백년이 지나 태어난 사람이고 물론 공자에게서 직접
그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다. 성은 맹(孟), 이름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 또는 자거(子車)라고 한
다. 태어난 곳은 공자의 노나라에 가까운 추(鄒)였다. 일찍부터 공자의 가르침을 존경하고 믿어서,
공자의 뒤를 이은 대유(大儒)가 되었다. 유교를 공맹의 도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맹자
의 시대는, 공자가 살던 시대보다도 한층 더 전란의 양상이 심각하게 되었고, 또 제자백가가 다투
어 일어났던 때이므로 맹자의 논의가 첨예화할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맹자도 당시의 제
자백가와 똑같이 각국의 제후 사이를 유세하고 있었지만, 어떠한 군주도 맹자의 설이 매우 이상
적이지만 비현실적이라고 해서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일시적으로 제나라에서 경(卿)
의 신분을 얻었다고 하는 설이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당시의 백가와 마찬가지로 정치
고문으로서 세월을 보내 만년에는 학문과 교육에 전념해서 생애를 마쳤다.
맹자 사상의 근본은, 가족도덕에 의한 정치 및 이것을 보충해주는 것으로서 예의 존중을 설명한
점에 있어서, 공자의 사상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양상이 훨씬 치열 하였던 것이 반영
되어서 공자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경향도 나타나 있다.
그 하나는 민중을 위한 정치를 강조하여 그것을 위해서는 혁명도 행 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
다. 맹자의 유명한 말에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다음가고 군주는 가볍다 라 하는 것이 있다. 사직
(社稷)의, 사는 국토를 상징하는 신, 직은 곡물의 신이어서, 국가최고의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
하여 국가와 동의어로써 사용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민중이고, 군주는 그 종복에 지나지 않는다
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군주가 그 사명을 잊고 개인의 이익을 따라 민중의 행복을 살피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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