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이황과 이이의 교육 사상
성리학의 수용과 전개
유교의 사상과 제도가 부분적으로 전래된 것은 기원전 3세기이다. 본격적인 발달은 삼국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태학(太學)을 세운 소수림왕 2년 (AD 372)을 유교 전래의 원년으로 보지만 통일 신라 이전까지 유교가 사상계의 독자적 지위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라는 문무왕 때부터 중국과 교류하면서 문화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신문왕 2년에 ‘국학(國學)’을 세웠다. 국학의 교육 목적은 유교의 사상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것과 유학의 이념에 따른 관리 양성이 주목적이었다. 원성왕 4년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두고 그 출신을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강수는 통일 신라 최초의 유학자라 할 수 있다. 그는 불교 숙명론을 배격하였다. 그는 유교의 사상과 문학을 근거로 하여 공부한 학자로서 문장에 뛰어나고 특히 외교문서를 짓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설총은 경학(經學)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서 구경(九經)을 이두(吏讀)로 써서 후학을 가르쳤으며 후에 고려 시대에 이르도록 학문의 종장(宗長)으로 추앙 받았다. 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유학자로서 유불도의 합류에 관심을 가졌다. 그를 순수한 유학자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
고려는 본래 건국 이념이 불교이어서 순수 유학이 발달하기에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유가적 문학만이 유지되어 왔는데 주로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읽어서 된 것들이었다.
유교의 교육자로서 해동공자(海東孔子)라 칭송을 받았던 최충을 들 수 있다. 그는 ‘구제(九齊)’ ‘십이공도’등의 학교를 세우고 삼사(三史: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와 시부를 기본적 교과서로 삼아 가르쳤다. 고려는 불교 국가였지만 유교는 정치, 교육, 윤리, 학문, 문화 등에서는 일관된 영향을 미쳤다. 송대의 성리학(性理學)이 들어오면서 고려의 유학은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의 등장과 함께 세력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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