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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과 4.19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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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과 4.19묘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조용히 개굴창에 넣고/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기념탑을 세우자/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김수영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첫 연).
김수영(1921~68)의 이 시는 그의 가장 좋은 시도 아니며 4․19를 노래한 가장 빼어난 시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1960년 4월26일 이른 아침에 쓴 이 시는 4․19의 순수 절정의 순간을 직접 호흡하고 있다는 미덕을 안고 있다. 이날 나온 이승만 대통령의 사의 표명은 2백명 가까운 젊은 목숨을 바쳐가면서 학생과 시민들이 갈구하던 바의 최대치는 아니더라도그 최소치에는 가까웠던 것이다.
1960년 3월15일의 제5대 정부통령선거는 국부' 이승만의 본질과 한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기회와도 같았다. 노욕과 망상으로 똘똘 뭉친 우남이 입 안의 혀 같은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고자 저지른 미증유의 선거부정은 당장 그날로부터 민중의 거센 저항에 부닥친다. 마산에서 터져 나온 항의시위는 8명의 사망자와 72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그보다는 그날
실종된 한사람이 결과적으로 더 큰 파장을 몰고 오게 된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4월11일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몰골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그였다.
김주열의 주검에 다시 십여명의 사상자로 대답한 마산의 2차 시위는 남한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4월18일 고려대학생 3천여명이 국회의사당 앞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정치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한 사건은 그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19일 성난 학생과 시민들은 종로와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 앞까지 치달아 독재타도를외쳤으며 경찰은 발포로써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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