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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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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끼전
하늘과 땅이 비로소 열릴 때 만물이 번성하니, 그 가운데 귀한 것은 인생이며 천한 것은 짐승이었다.
날짐승도 삼백이고 길짐승도 삼백인데 꿩의 모습을 볼라치면 의관은 오색이오 별호는 화충이다. 산새와 들짐승의 천성으로 사람을 멀리하여 푸른 숲속 시냇가에 휘두러진 소나무를 정자 삼고, 상하로 펼쳐진 밭과 들 가운데 널려 있는 곡식을 주워 먹고 살아간다.
그러나 임자 없이 생긴 몸이라 관포수(官砲手)와 사냥개에게 툭하면 잡혀가서 삼태육경 수령방백 새와 들짐승과 다방골 제갈동지들이 싫도록 장복(長服)하고 좋은 깃 골라내서 사령기(使令旗)에 살대 장식과 전방 먼지털이며 여러 가지에 두루 쓰여지니 그 공적이 적다 하겠는가
평생을 두고 숨어 있는 자취와 좋은 경치를 보고자 하여, 구름 위로 우뚝 솟아오른 높은 봉에 허위허위 올라가니 몸 가벼운 보라매는 예서 떨렁 제서 떨렁하고, 몽치를 든 몰이꾼은 예서 '우여!' 제서 '우여!' 하며, 냄새 잘 맡는 사냥개는 이리 컹컹 저리 컹컹 속잎포기 떡갈잎을 뒤적뒤적 찾아 드니 살아날 길 바이 없구나 사잇길로 가려 하니 하도 많은 포수들이 총을 메고 들어섰으니 엄동설한 굶주린 몸이 이제 다시 어느 곳으로 가야 한단 말인가
하루 종일 푸른 산 더운 볕에 뉘 아래로 펼쳐진 밭이며 너른 들에 혹시라도 콩알이 있을 법하니 한 번 주우러 가 볼거나.
이때 장끼 한 마리 당홍대단 두루마기에 초록궁초 깃을 달아 흰 동정 씻어 입고 주먹 같은 옥관자에 꽁지 깃털 만신풍채 장부 기상이 역연하구나. 또 한 마리의 꿩 까투리의 치장을 볼라치면 잔 누비 속저고리 폭폭이 잘게 누벼 위 아래로 고루 갖추어 입고 아홉 아들과 열둘의 딸을 앞세우고 뒤세우며,
어서 가자, 바삐 가자! 질펀한 너른 들에 줄줄이 퍼져서 너희는 저 골짜기 줍고 우리는 이 골짜기 줍자꾸나. 알알이 콩을 줍게 되면 사람의 공양을 부러워하여 무엇하랴 하늘이 낸 만물이 모두 저 나름의 녹이 있으니 한 끼의 포식도 제 재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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