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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기미년조의 西征을 전후해 나타나는 정치세력간의 대립양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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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기미년조의 西征1)1) 이 글에서 西征이란 ‘광해군 11년 기미년 2-3월에 조선이 명의 요청에 따라 후금 정벌을 위해서 도원수 강홍립이 이끄는 만여명의 군사를 파견했던 일’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을 전후해 나타나는
정치세력간의 대립양상 고찰
1. 머리말
2. 기미년 西征의 전개와 그 과정에서의 대립양상
3. 西征 실패 직후의 제 대립양상
4. 맺음말
1. 머리말
우리가 광해군(재위 1608-1623)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것을 들자면 중립적 실리외교를 편 임금, 그리고 쫓겨난 임금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가 사대외교라는 조선초 이래의 외교원칙을 깨고 시기에 적합한 외교정책을 폈다는 것, 또 그로 인해 폐위되었다는 사실은 조선조의 임금들 중에서 충분히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소지가 있다. 그리고 그의 실각이 조선의 대외정책 변화를 가져와 병자호란의 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광해군은 어쩌다가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을까 그를 보필해야 할 신하들과의 견해 차이가 어느 정도였기에 폐위까지 당해야만 했을까 여기에 외교정책에서의 견해 차이가 아닌, 다른 힘의 논리가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위와 같은 의문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줄 만한 극적인 사건이 하나 있다. 광해군 11년 기미년의 西征 - 조선이 명의 압력에 의해 신흥 군사강국인 후금과 원치 않은 전쟁을 하게 되었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은 명의 전통적 영향력과 후금의 군사적 위협 사이에서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필자는 이같은 국가적 위기상황하에서 행해진 외교정책의 입안 주체들과 그들 사이의 논쟁에 대해 주목하였다. 실리적 외교를 통해 체제를 수호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던 광해군과, 명에 대한 보수적 사대외교를 일관되게 주장하며 왕권을 계속 견제하던 제신 세력들. 이 글에서는 기미년 西征의 전개와, 이를 전후해 이루어지는 이 두 세력간의 논쟁과 그 안에 숨은 힘의 논리를 파악해 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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