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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와의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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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와의 항쟁
무인정권의 대몽항쟁
북아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으로서 성장한 몽고의 가장 중요한 정복 대상은 남쪽 농경민족이었다. 그것은 농경민족들이 지니는 풍부한 생산품이 그 구미를 돋구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하여 금․송과 함께 고려도 몽고의 침략 대상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금을 치고 남송과 일본을 정복하기 위한 기지를 구하려는 목적도 몽고가 고려에 침략의 손을 뻗친 하나의 이유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가 몽고와 최초의 접촉을 가지게 된 것은 몽고에게 쫓겨 오는 거란인을 협공하던 때부터였다. 거란인은 금이 망할 무렵 독립하였다가 다시 몽고에게 쫓기어 고려의 국경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들은 강동성에 의거하였으나 고려는 몽고와 함께 이를 함락하여 버렸다.(고종6년, 1219). 이러한 일이 있은 이후 몽고는 고려에 대한 은인으로 자처하고 매년 고려로부터 공물을 취하여 갔다. 그 요구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에 고려는 이에 불응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계기로 고려와 몽고와의 사이는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몽고의 사신 著古與가 고려로부터 귀국 도중에 살해된 일을 구실로 드디어 고종18년(1231)에 제 1차 침입을 하여 오게 되었다.
살례탑(살리타)이 거느린 몽고군은 귀주에서 박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으나, 이를 버려 둔 채 수도 개경에 임박하였다. 이에 고려가 강화를 청하자 몽고는 達魯花赤(달노화적)을 서북면에 두고 군사를 철퇴시켰다. 그러나, 최이는 몽고와의 항쟁을 결의하고 서울을 강화로 옮기었다. (고종19년, 1232). 이것은 바다를 두려워하는 몽고의 약점을 찌른 것이었다. 귀족들이 강화로 들어감과 동시에 일반 백성들에게도 산성이나 해도로 피난케 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항몽정책은 몽고를 자극하여 재차의 침입을 보게 되었다. 비록 몽고의 장군 살례탑이 처인성(용인)에서 김윤후가 거느린 처인부곡민에게 사살된 후 곧 물러갔으나, 뒤에도 몽고의 침략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러하여 몽고는 전후 30년 간에 6차례의 침입을 해 오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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