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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지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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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17∼18세기 조선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17세기 중엽 대동법의 실시로 공물를 둘러싼 여러 가지 폐단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나, 17세기 말∼18세기 전반 조선사회에는 군포의 폐단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이 문제는 良人壯丁 1인이 부담하는 군포량을 2필에서 1필로 감해주는 균역법이 실시되면서 해결의 실마리는 찾게 되었다. 나아가 균역법은 18세기 후반부터 노비제가 빠르게 해체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였다. 17∼18세기에 걸쳐 일어난 이러한 변화는 그 시기 농업부문의 변화를 일정 정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이시기 농업부문의 변화에 관해서는 이미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이앙법의 일반화에 힙입어 18세기 이후가 되면 농촌사회에서는 경영분해가 일어나고, 나아가 자본주의적 성격을 띤 廣作農이 출현한다는 견해가 일찍부터 제시되었다.1)1) 대표적인 연구성과 몇 개 예시하면 아래와 같다.
金容燮, 1970 朝鮮後期農業史硏究Ⅰ 一潮閣 ; 金容燮, 1971 朝鮮後期農業史硏究Ⅱ 一潮閣 ; 宋贊植, 1970 「朝鮮後期農業에 있어서의 廣作運動」 李海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 허종호, 1989 조선봉건말기의 소작제연구 한마당
이들 견해에 의하면 이앙법 보급의 결과 동일한 노동력 규모로도 경지면적을 그 이전보다 더 확대할 수 있게 되고, 지대형태가 정율 타작제에서 정액 도조제로 바뀜으로써 광작농이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다수의 연구자들은 비판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2)2) 대표적인 연구를 몇 개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李世永, 1985 「18*19세기 兩班土豪의 地主經營」 韓國史論13 ; 李永鶴, 1990 「韓國 近代 煙草業에 대한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李潤甲, 1991 「韓國近代의 商業的農業 硏究」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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