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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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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청의 건국
1. 후금의 건국과 누르하치
현대 중국의 동북 지방에는 고래로 퉁그스계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때로 발해나 북송을 멸망시키고 국가를 형성하기도 하였는데 금 등이 이런 국가이다. 이들은 쥬르첸(女眞)족이라 불리었는데 명조 때에는 건주(), 해서(), 야인() 여진의 3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명조는 여진 각부족장들에게 지휘사란 관직을 주고 이에 덧붙여 조공무역의 권리를 인정해줌으로써 그 이익에 이끌려 명측에 복속되도록 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조는 관직만 수여했을뿐 부족 내부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명조의 지배방식은 여진 각부의 상호견제를 유발하여 민족의 단결을 제지하는 작용을 했다.
명초에 건주 여진은 수렵과 목축에 종사하였으나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농업생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증대되었고 명 중엽 이래 건주여진은 남하하면서 중국과 조선의 영향으로 비교적 빠른 발전을 이루었다. 즉, 농업 생산이 크게 촉진되었다.
농업의 발전에 따라 사회적 분업도 출현하고 특히 수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이 위에 상업교류로 점차 융성해 갔다. 이러한 여진의 경제적 발전은 내부의 계급 모순을 격화시키면서 건주 여진은 가부장적 노예제 단계로 들어섰다.
여진족의 사회․경제적 발전위에 16세기 말에는 임진왜란 등의 영향으로 명조의 통제가 이완되자, 독립의 형세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건주 여진족에서 누르하치(奴爾合赤)가 나타나 먼저 건주 여진을 장악하고 후에 나머지 부족을 통합하여 후금을 건국하였다.
후금의 건국에는 당시 명의 국내정세가 큰 도움을 주었는데, 명말 신종의 방종과 환관정치의 폐단으로 사회와 경제가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특히 국제정세가 조선에 쏠려 있어서 만주에 대한 관심이 소홀하였고 명의 조선출병은 군사재정을 약화시켰다. 또한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추진하였던 계정수전(計丁授田)제도와 군사력의 핵심인 滿洲八旗兵의 활약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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