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말 원조의 삭감으로 독점적 초과이윤의 주된 기반을 상실하고 축적의 위기에 봉착한 관료자본에게는, 이승만 정권은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무능한 부르조아 정권’이었다. 게다가 이승만 정권은 위기에 대한 부담을 단지 반민중적 조세제도 등을 통해 민중에게 떠넘김으로써 광범한 계급·계층들의 커다란 저항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50년대 말의 위기는 신식민지자본주의가 더 이상 낡은 기존의 사회구조를 가지고서는 재생산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모든 사회세력들로부터 어떠한 형태로든 새로운 재편을 요구받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신식민지자본주의 체제상의 위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가 집약적으로 표출된 것이 4·19이다.
신식민지자본주의 체제상의 위기를 해소하는데 있어서 당시의 한국사회가 선택 할 수 있었던 대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진영에 의한 ‘혁명적 민주주의의 길’-종속적 축적구조의 청산과 진정한 민족경제로의 길-이며, 다른 하나는 반동부르조아지에 의한 축적구조의 재편의 길-제국주의 체제로의 보다 깊숙이 편입되는 과정에서 신식국독자로 성장·전환해가는 길-로, 이러한 두 가지 발전 방향만이 현실적 가능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혁명적 민주주의적 길의 담당세력으로서의 민중은 비록 4·19를 촉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요구되던 혁명적 민주주의적 과제를 철저하게 수행해 나가지는 못하였다. 그 결과 제2공화국이라는 자유주의적 부르조아 정권의 수립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러나 장면 정권은 종속적 축적구조에 객관적으로 조응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축적 메커니즘이 지닌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무기력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내외독점자본뿐만 아니라 저계급·계층에게 위기적 상황으로 인식되었고, 이러한 위기의식을 배경으로 군부가 5·16군사 쿠데타를 통해 민주당 정권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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