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창 밖의 보름달이 파랗게 보이는 이유는 쌀쌀한 겨울 날씨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래 서 그 겨울밤에 찬바람이 잔잔히 흐르는 들녘에 나와 저 달을 향해 힘껏 후- 하고 따스한 입김을 보내주 었던 유년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미한 잔상으로 기억 언저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더 군다나 지금의 삶은 그 어린 시절의 따스한 세계를 훨씬 이탈해 버린 듯한 느낌이다. 세계에 대한 무조 건적인 친화력을 상실해 버린 느낌이다. 이제 나는 융을 만나려 한다. 융과 더불어 저 어두운 그늘에 고 여 있는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건져내는 모험을 감행하려 한다. 그리하여 인간 정신의 깊은 의미를 헤아려 보고자 한다.
나는 1992년 대학 도서관에서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1]을 통하여 융을 처음 만났다. 이 책은 융의 방대한 저서와 깊은 사상을 독자들에게 쉽게 전하기 위하여 융과 제자들이 집필한 책이다. 지금 생각컨 데, 그 책에 대한 첫 인상은 여느 책과는 조금은 달랐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책은 다양한 장면을 담은 사진과 그림과 미술작품, 심지어는 만화책에 나올 법한 낙서들 덕분인지, 글자가 정갈하게 배열된 여느 책과는 달리 매우 현란한 잡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앞 페이지에 있는 융의 시선은 나를 뚜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어디에서부터 홀연히 다가왔는 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융과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모든 만남은 이렇듯 우연한 만남일까. 그 때부터 지금 까지 융과의 만남은 나의 가슴을 잔잔한 감동과 여운으로 이끄는 소중한 만남이 되었다. 이제 융은 마음 의 고향이자 삶의 풍요로운 자양분이 되어주는 커다란 그루터기이다. 그리고 그는 안개와 같은 내면의 세 계를 향해 길을 조금씩 열어주는 영원한 유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