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어떤 김치무리를 담가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왔던 중국과 일본의 기록을 참고하여 김치의 유래를 살펴보면 그 시대의 김치무리에 대한 모습을 대강 알 수 있다.
중국의 시경(詩經) 에 밭 속에 작은 원두막이 있고 외가 열려 있다. 이것으로 정성껏 저(菹) 를 담가 조상께 바치면 수(壽)를 누리고 하늘의 복을 받는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의 저 가 최초로 기록된 김치무리로 보인다. 그 후 진나라 때 편찬된 여씨춘추(呂氏春秋) 에는 주 문왕이 저를 즐겼다는 말을 듣고 공자가 콧등을 찌푸려가며 저 를 먹어 3년 후에야 비로서 그 맛을 즐겼다 라고 하였고 설문해자(說問解子) 의 저(菹) 는 신맛의 채소이고, 저(菹)는 초에 절인 오이 라고 한 구절에서도 김치무리를 볼 수 있다. 또한 주례(周禮) 에는 칠저(七菹) 가 나오는데 이것은 부추, 순무, 순채, 아욱, 미나리, 태(죽순의 일종)와 죽순 등으로 담근 김치무리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으로는 구체적인 조리법을 알 수 없다. 후위(後魏) 말엽(439~535년)에 편찬된 제민요술(齊民要術) 에는 젖산 발효를 이용한 김치무리 12종과 초절인 김치무리 16종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리법을 추정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제민요술 이 편찬된 때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이므로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김치무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