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선언의 후광과 3김이 각축 속에 30%라는 지지를 얻고 정권을 잡은 노태우 정권은 임기중 ‘중간평가’를 받을 것을 공약으로 하고 불안한 출발을 하였다. 임기 2년째인 89년 5공 청산과 각계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거세 지고 그사이 전교조 결성은 정권의 큰 부담으로 작용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건’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한 정권의 강력한 통제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당하고, 다른 운동권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후 6공은 공안 합수부를 구성하고 동의대 사태로 국민의 對운동권 여론을 악화시키며, 정국의 주도권을 회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철규 변사 사건으로 정부는 다시 수세국면에 몰리게 되어 결국 합수부가 해체되었고, 학생들의 ‘통일 운동’은 정부가 주도권을 주고 있는 통일 정책에 큰 위협을 가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특히 임수경의 방북 사건이 학생 운동에 의해 ‘통일의 꽃’으로 묘사되면서 이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정권 안보의 수단으로 이용해 온 정부의 입지를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통일을 향한 학생운동의 파도와 함께 참교육 실천을 위한 전교조 결성 운동과 노동계의 노조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져 정부의 노동 정책에 일대 혼란을 가져오는 일이 벌여 졌다.
이때 평민당은 ‘6개월내 5공 청산 안하면 노정권 종식 투쟁’ 이라는 강경노선으로 급선회하는 태도변화를 보였다. 당시 노정권은 ‘동해시 선거 매수 사건’ 으로 민주당의 발목을 잡고 김영삼 총재의 소련 방북을 지원하여, 민주당으로부터는 5공 청산문제에 대해 일정한 후퇴를 얻어내고 있었기에 5공 청산문제에 있어 평민당을 마지막 장애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김대중 총재가 장외 투쟁을 표명한 다음날 새벽 0시 30분 서경원 의원을 전격 구속하여 정국을 다시 공안 정국으로 몰아 붙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