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정부는 북진통일론에 따라 1955년 8월 1일 개성․옹진 지역 즉각 수복 방침을 발표했으나 미국과 대부분의 군장성이 반대하는 데다 민주당이 화전양양론(和戰兩樣論)을 주장하고 진보당도 이듬해 대선을 계기로 평화통일론을 들고 나옴으로서 북진통일론은 퇴조하기 시작한다.
민주당의 이 같은 주장은 자유당의 북진통일론 자체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는 정부의 실정을 부각시켜 이승만 정권의 권력집중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1956년 대선에서는 통일은 무력으로도 가능하고, 평화적으로도 가능하며, 중요한 것은 화전양면(和戰兩面)에 걸쳐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그러나 4.19 이후 7.29 선거에서 압승한 민주당은 8월 24일 정일형 외무장관의 ‘7개항 외교정책성명’을 통해 “북진통일 같은 무모하고 무계획적인 슬로건을 버리고 국제연합의 결의를 존중하여 유엔감시하에 남북한을 통한 자유선거에 의한 통한정책을 수행한다”고 천명했다.
같은 해 8월 27일 장면총리는 국회 시정연설에서 “9월 유엔총회에서 한국통일방안과 한국의 유엔가입에 관하여 국제여론을 환기하겠으며, 통일은 구정권의 태도와는 달리 유엔 자유국가들의 노선과 일치하도록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자유총선에 의해 달성토록 하겠다”고 강조함으로써 화전양양론은 무게를 잃고 만다.
2. 중립화통일론
4.19 직후의 중립화통일론은 냉전을 배경으로 하는 통일론의 하나로 제기됐다.
중립화라는 통일 방법론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재미 한국인 김용중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미․소․영․중 4국에 의한 중립화 협정과 유엔 중립국 감시하의 총선을 통한 통일을 주장했다. 이외에도 일본에서는 김삼규가, 북쪽에서는 조소앙․최창익 등이 중립화 통일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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