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대와 1890년대에 마르크스의 著作에 대한 관심이 널리 퍼져갔다.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결합할 수 없었던 다수의 지성인들도 그들의 지적 발전에서 마르크스에 많은 신세를 졌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적 조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과정은 길고 어려운 것이었다. 사실 19세기 말에 서양의 중요한 나라들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운동을 이끈 정치인들이나 노동계급 행동주의자들에게 있어서도 마르크스주의는 불완전하고 피상적으로 이해되었을 뿐이었다-그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되풀이해서 애통 하게 생각한 일이었다.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적 정당으로 알려진 정당들도 마르크스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요소를 강령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1883년에 타계하기 직전에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타격을 받은 후에 절망에 빠져 엥겔스에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Nicolaievsky , p. 403).
마르크스주의를 모델로 삼은 것으로 여겨진 정당, 즉 아이제낫흐 지지자들과 라살 지지자들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것의 긴 역사의 대부분을 통해 [獨逸 사회민주당](SPD, Sozialdemokraische Partei Deutschlands)으로 불려진 당에도, 특히 그것의 초기 몇 년에는 그같은 말이 적용될 수 있었다. 1875년에 통합된 후에도 그 당의 지도자들의 대부분은 마르크스의 작품들을 진지하게 연구하는데 있어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런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계속해서 머문 곳)으로부터 제공되는 충고를 흔히 회피했다. 1875년의 고타 강령(Gotha Program)은 마르크스가 공개적은 아니지만 격렬히 비판하게 된 원인이 되었는데, 그 강령의 얼빠진 민주적 語法도 부분적인 이유였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에 라살적 요소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