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이론에 관한 언급들은 오늘날 대부분 잊혀졌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社會主義역사상 보다 괄목할만한 한 인물 바뵈푸(François Noel Babeuf: 혹은 로마의 유명한 혁명가의 이름을 따 스스로 그렇게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 그락쿠스)에 의해 원용되므로써 간접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가라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미래의 세대에 영감을 줄 大義를 위해 죽은 영웅적인 순교자였다.
2. 바뵈푸 사상에 대한 연구
바뵈푸는 사상에 있어서는 공산주의적 계몽사상가들보다 덜 독창적이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루소, 마블리, 모렐리(그는 모렐리를 디드로로 오인했다)등 계몽사상가들의 작품과 상-뀔로뜨의 요망사항을 품위없게 혼합한 것에 불과했다. 바뵈푸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후대의 혁명가들에 의해 칭송받았던 이유는 그의 사상이 독창적이거나 일관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의 社會化란 명분하에 격렬한 혁명적 행동의 세계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들은 유창한 플라톤적 대화체가 아니라 강력한 선언문 형식으로 제시되었다. 그는 과격한 정치가 즉, [공포정치]기간 중에 [공안위원회]의 정치적 고안물에 매혹된 인물이었지만, 쟈코뱅적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은 인물이었다.
바뵈푸가 공산주의적 혁명가가 된 경위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특히 과세와 관계되는 귀족의 특권에 대한 여러 주장의 법률상 근거를 추적하면서 莊園 문서 관리인(commissaire a terrier)으로서 수년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그는 농민들에게 점차 과중하게 부과되었던 세금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오래된 법적증빙문서를 숙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표현한 대로 “귀족의 혐오스런 비밀들”의 수호자가 되는 것을 혐오하였다. (Scott, Babeuf, 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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