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레이 보웬(Murray Bowen, 1913-1990)은 산업혁명이후 테네시 주(Tennessee)에서 5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군복무 생활을 통하여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의 경험과 군에서의 경험에 의해 정신의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정신과 의사가 되었고 의대를 졸업 후 1941-46년까지 2차 대전 때 5년 동안 관절을 고치는 외과의사로서 복무했는데 후에 정신과 의사로서의 수련은 1946년에 매닝거(Menninger) 병원에서 시작해서 1954년까지 근무했다. 이때 정신분석학적 배경을 가진 보웬은 '왜 다 같이 비슷한 정신 외상적 사건을 경험해도 어떤 사람은 장애를 나타내고 어떤 사람은 장애를 나타내지 않는가? 또 왜 같은 정신분열증을 가진 모친 아래에서 자란 형제들 중에 어떤 형제는 정신분열증을 나타내는데 어떤 형제는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런 의문은 정신분열증을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여기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이론에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보웬으로 하여금 개인치료에 초점을 둔 정신분석학적 접근에서 가족을 체계로 보고 접근하게 된 계기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치료였다. 1954년 정신건강국제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로 옮긴 후 보웬은 어머니와 정신분열증 환자 그리고 가족들로 하여금 2년 반 동안 병원에서 생활하도록 하였는데 정신분열증을 가진 환자가 어머니와 강한 애착을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 중요한 첫 가설을 세우게 된다. 이것이 모자공생가설(Mother-child symbiosis)이다. 또한 아버지역시 모자간의 상호 작용에 적극적으로 지원하거나 혹은 수적으로 도피함으로 모자공생관계 형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보웬은 정신분열증이 개인 혹은 모자간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의 문제인 것을 깨닫게 되었고 가족의 정서적 과정은 한 개인뿐 아니라 전체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하고 전체 가족을 하나의 정서적 단위로 보게 되었다.
보웬은 1959년 NIMH를 떠나 조지타운 대학 메디컬센터(Georgetown University Medical Center)의 책임자로 부임해서 이전과 달리 정신분열증 환자보다는 덜 심각한 문제를 가진 가족을 치료하면서 모든 가족에게 일어나는 과정에 적용시킬 수 있는 광범위하고 확고한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보웬은 가족치료에서 새로운 용어를 창조한 선구자로 일종의 초심리학(metapsychology)이란 제목을 갖고서 가족치료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전쟁에서의 경험이 정신과 의사로 돌아서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보웬의 체계적 가족치료에서는 개인들이 근본적인 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