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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구빈법의 발달과정을 서술하고 구빈법이 갖고 있는 문제점과 의의에 대해 작성하시오에 대한 레포트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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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구빈법의 발달과정을 서술하고 구빈법이 갖고 있는 문제점과 의의에 대해 작성하시오
영국은 유럽 의류 원자재의 생산지로서 지주들이 다투어서 농지를 목장으로 바꾼 결과 대량의 소작인들은 농작농민으로서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부랑자가 되어 런던과 같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더구나 헨리 8세(1491-1547)는 로마교황청에 대항하여 스스로 영국 국교의 수장이 되어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을 국고로 환원시키고 수도원을 해산해 버려서 그곳에서 돌보던 부랑자들도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다. 또한 부랑자를 엄벌에 처함으로써 탄압하더라도 귀농시킬 장소가 없으므로 부랑자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구빈사업은 자선사업시대와는 달리 부랑하는 빈민을 이웃 형제로 보지 않고 사회질서를 해칠 수 있는 집단으로 간주하여 이들을 억압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다. 빈곤의 원인을 부랑빈민이 일을 하기 싫어하는 도덕적 결함에서 찾았다. 요컨대 빈곤 그 자체를 범죄행위로 간주했다.
구빈사업의 대표적 법령은 1601년에 제정된 "엘리자베스 구빈법"인데, 여기에서는 빈민을 노동능력의 소유 여부를 기준으로 (1) 노동능력이 있는 빈민, (2) 노동능력이 없는 빈민, (3) 보호자가 없는 아동으로 분류했다. 건강하고 노동능력이 있는 빈민(오늘날 용어로는 실업자이지만 그 당시는 부랑자 bagabond와 범죄자의 이미지가 포함되었다)에게는 작업장(workhouse)에서 강제취로를 하게 했는데, 이곳에서 도망쳐서 구걸하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게으른 자에 대해서는 교정원(house of correction)에 1년간 감금하여 중노동을 시켰다. 노동능력이 없는 빈곤자(노인, 만성질환자, 시각장애인, 정신장애인)는 구빈원(poorhouse)이나 의료원(almshouse)에 입소되었다. 보호자가 없는 아동은 남자의 경우 24세까지, 여자의 경우 21세 또는 결혼할 때까지 양모공장 등에 도제로 보냈다.
이러한 구빈사업은 영국 국교회의 교구(parrish, 중세에 출현하여 1888년 지방정부법의 제정 이전까지 지방정부의 역할을 담당함)를 단위로 행해졌지만, 교회의 사업이 아니라 그 지구의 유지로서 귀족을 중심으로 실시된 사업이었다.
구빈사업은 사회복지의 역사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 복지의 주체가 교회로부터 귀족에게 이행되었다. 둘째, 국가입법으로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셋째, 부랑자를 가능한 한 취로하게 함으로써 자활시키려는 노동정책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1601년에 집대성된 구빈법은 1948년 국가부조법의 제정으로 그 효력을 상실할 때까지 약 350년간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사회복지제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구빈법은 그 후 계속적으로 늘어나는 구빈비용 지출을 억제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개정이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은 1662년 "거주지제한법", 1722년
...(이하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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