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이후, 산업의 확장으로 수십만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이 도회지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도시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산업 근로자에게 필요한 주택을 건립하지 않는 한, 쉽게 거쳐할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많은 박애가는 만족스럽지 못한 주택환경으로 인한 노동자 계급의 건강과 사기에 심각한 위험이 있음을 폭로하였다.
부유한 공장 소유주가 버리고 간 오래된 저택은 노동자 가족을 위해 소규모 아파트나 여러 개의 단칸방으로 개조되었다.
공장 근처의 정원과 공지는 위생, 환기, 화재에 대비한 안전시설도 갖추지 않은 채 설립된 모조건축물로 급속히 들어섰다.
새로운 산업지역의 건축주는 최대의 이익을 올리기 위해 모든 에이커의 땅에 가능한 많은 거주자를 몰아넣는데 혈안이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일부 박애적인 고용주는 몇 개의 시범주택을 짓기도 하였다. 이들의 주도로 1842년에 산업노동자 계급의 주거 개선을 위한 대도시협의회가 런던에서 결성되었다.
차드윅의 제안에 따라 여러 도시는 콜레라와 발진티푸스의 위험을 막기 위해 가장 지저분한 빈민가를 제거하도록 하였다.
노동 대중의 빈곤과 타락에 관심을 가졌던 밀(Mill), 칼레(Carlylr), 러스킨(Ruskin), 디킨스(Dickens) 등의 저서는 주택개혁에 관한 대중의 관심과 의회에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였다.
빈인가 지역에서의 불결한 주택환경과 노동자에 대한 착취에 대항해 투쟁한 탁월한 인물로는 힐 (Hill)을 들 수 있다. 그녀는 기독교 사회주의자 마우리스 (Maurice)를 찬양하는 사람이었다.
1864년에 철학자 러스킨의 도움으로 힐은 런던의 빈민가 주택을 재건하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높은 집세를 낼 수 없는 노동자 가족에게 위생적이고 적절한 생활처를 싼 값으로 세를 주었다.
이 일을 추진하는데 지역사회의 많은 여성 자원봉사자의 협조를 얻었다. 여기서 여성 자원봉사자는 매달 거주자로부터 집세를 받아내고, 노동자가족에게 경제적인 가정운영, 건전한 여가활동에 관한 조언을 하는 일 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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