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0월 뉴욕 증권거래소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경제공황은 미국 사회복지의 원리와 실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 당시까지 공적 구호는 주로 시나 군에서 정치적으로 임명 사람이나 민생위원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빈곤을 죄악이나 태만으로 판단하였으며 구제의 수준은 겨우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정도였다. 공공구호기관의 직원으로서 훈련된 사회사업가는 겨우 40여개의 큰 도시에만 있었다. 민간 가정복지기관은 400여 개의 큰 도시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재정적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족은 민간기관으로 갔었다.
여기서는 이들 가족이 구빈을 위한 도움을 호소하는 데 따르는 모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 주었다. 빈민구제에 대한 공공지출은 대공황이 일어나기 20여년 전에 서서히 증가하고 있었다. 민간기관은 빈곤을 예방하고 자활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한 그들의 방법이 보다 경제적이며, 세금으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대공황 당시 실업자의 수효는 1929년 봄에 286만 명에서 1930년 1월에는 4백만 이상으로 증가되었다. 대도시에서 사람은 점차로 증가하는 실업자 집단을 도와주는 주요한 재정적 지원책으로서 민간기관을 찾게 되었다. 지방의 민간복지기관은 그 때까지 도움을 요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신청자를 돕기 시작하였다.
많은 실업자는 문을 닫지 않은 은행으로부터 저축하여 두었던 돈을 사용하였다. 다른 사람은 친척이나 친구, 식료품상인, 방장수로부터 돈을 빌려 줬다. 신용은 짧은 기간 내에 없어지고 가족은 먹여 살릴 수도 없었으며 집세도 지불할 수가 없게 되었다. 2-3개월 동안에 민간사회기관은 그들이 지닌 전체 연간 예산을 소비하였고, 예비재원마저 고갈되었다. 따라서 기관의 자체활동을 계속하기 위한 부채를 젊어지기에 이르렀다.
1930년 봄에 이르러 모든 민간기관과 공공기관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은 민간기관이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리라고 기대하였지만 이런 신뢰는 고갈된 재원을 감당할 수 없는데서 무산되고 말았다. 공동모금협회는 특별 긴급캠페인을 함으로서 필요한 기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기업 지방에 모금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노력은 몇 개월간의 시간만 낭비하였을 뿐 실업자의 수는 점차 증가하여 1930년 봄에는 460만 명을 넘기에 이르렀다. 알칸사스(Arkansas), 캔터키 (Kentucky), 루이지애나(Louisiana), 미시시피 (Mississippi), 오클라호마(Oklahoma)주 등에는 심한 가뭄과 텍사스(Texas)주에서도 경제상황이 악화되었다.
후버(Hoove) 대통령은 도움을 요청해 온 각 주에 대한 연방원조를 거부하였다. 그는 이 긴급사태가 단시일 내에 그칠 것으로 예측했다. 여기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