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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와 이라크
C.이라크 전쟁이 이라크에 미친 영향
리비아는 독립 이후 왕정국가로 출발하였으나, 그 후 카다피의 독재가 42년이나 지속되었다.
또한, 리비아의 경제는 카다피의 사회주의 이상에 따라 중앙에서 계획되는 대로 운영되었다.
석유에 대한 서방의 탐욕은 후세인과 카다피가 출현하기 전부터 지속되어 왔고, 이는 독립 후에도 이라크와 리비아의 정치에 개입해서 이를 조종하려는 시도로 실현되었었다.
이 협정으로 인해 이라크는 1920년부터 영국의 위임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는 또한 이라크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던 영국을 막는 일이 되었다.
이로써 이라크의 내전이 본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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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 통치 시기
부족 정치
카다피는 그린북에서 부족의 관행을 떠올릴 수 있는 '직접적 참여 민주주의'와 부족의 자급자족을 떠올리게 하는 '원시적 공산주의'를 옹호하면서 부족 정치를 간접적으로 옹호한다.
다급해진 카다피는 자신의 통치기반을 강화시키기 위해 이슬람주의자와 군부에 기반한 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제3세계 이론(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과 모순
수단과 차드
1970년대 동안 차드의 무슬림 지도자인구 쿠니 웨데이와 이센 아브르는 차드의 정권을 두고 남부 기독교 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4월 30일 리비아 정부는 NATO 공습으로 트리폴리에 있던 카다피의 육남과 손자 셋 이 사망했다고 주장하였다.
2011년 8월 25일 트리폴리 대부분 지역이 카다피의 통제권을 벗어낫으며, 아랍연맹은 리비아를 회원으로 인정하되 카다피의 정부가 아닌 과도 국가위원회를 그 대상으로 삼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협정으로 인해 이라크는 1920년부터 영국의 위임 통치를 받게 되었다.
또한 영국의 재정손실은 4,000만 파운드로 이는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 중 아랍봉기군에 대한 지원의 3배 이상이나 되는 액수이다.
이에, 세계 1차대전 중 하쉼가의 도움을 받은 영국은 하쉼가의 파이살을 왕위에 추대하였고 1921년 8월 23일 파이살이 이라크 왕좌에 앉았다.
파이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가지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이라크 민족주의자들과 영국 사이에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내각을 유지했던 파이살과는 다르게 가지왕은 부족의 분열과 영국이 이라크의 정치에 심하게 간섭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라크 민족주의자들을 통제할 능력이 부족했다.
이 쿠데타의 성공으로 카심은 처형되었고 바아스당과 나 세르파의 지지와 함께 아레프 정권이 출범하였다.
바아스당은 아레프를 대통령으로 옹립시키고 세력을 확장하며 독재정치를 시도하려 하였는데 또 다른 지지세력인 나세르파가 바아스당을 견제하며 바아스당과 나 세르파 사이의 내전이 일어났으나 바아스당의 승리로 1963년 바아스 당 독재정권이 탄생하였다.
B.바아스당 쿠데타와 아레프 정권
아레프가 사망한 후, 1968년 바아스당 우파와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여 하산 알바크르(Hassanal-bakr) 장군이 정권을 쥐었고 바아스당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바아스당의 정책
바아스당은 쿠르드족과 이라크의 지속적인 내전을 경험하면서 쿠르드족 문제가 물리적 수단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유화정책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유화정책과 강경 정책은 여러 부족들을 친이라크 세력으로 만들었으며 친이라크 정부 쿠르드족으로 구성된 바아스당의 군대인 자쉬군은 안 팔작전에서 동족인 쿠르드인을 학살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바아스당을 입당한 뒤 사담 후세인의 첫 임무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카심의 암살이었다.
이후 63년 2월 바아스당의 쿠데타 성공으로 카심은 살해되고 후세인은 돌아왔지만 2년간의 망명생활로 인해 바아스당의 핵심 권력층으로부터 떨어지게 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바아스당 지도부에서는 사담 후세인을 당원으로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부족주의
사담 후세인은 부족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1968년 바아스당이 집권을 시작할 때 바아스당은 기본적으로 부족주의를 분열주의로 규정하고 이를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이에 그는 자신을 '부족장들의 부족장'으로 칭하며 부족과 부족주의를 이라크의 중 요한 정치 이념으로 부활시켰다.
91년 이후 시골지역에서의 보안 강화와 국경에 대한 도급계약 통제를 시도하면서, 정권은 군사적 부족 주의를 여러 아랍 부족들, 즉 순니파와 시아파에게도 확대시켰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란과의 8년 전쟁의 결과 이라크는 국내 경제 및 기간산업이 파괴되었고 엄청난 전비로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하지만 걸프전의 종식이 이라크와 쿠웨이트 간의 국경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박종평 / 북아프리카 정치발전에 관한 연구=ThePoliticalDevelopm entofAra bcou ntries inNorth Africa.한국외국어대학교 중동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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