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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 암살사건의 전개
김구선생 암살사건의 전개
1. 안두희와 서북청년단 ․ 홍종만 ․ 김지웅
안두희는 1947년 봄 월남하였다. 반공주의자인 그가 월남한 것은 당연하지만, 계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1945년 12월 일어난 신의주 학생사건의 여파 때문이었다. 그의 조
카뻘 되는 용암포 수산학교의 안창열이 사건에 연루되어 안두희까지 수사 대상에 오르자
월남을 결심하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그의 집안의 재산이
몰수되자 월남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1947년 안두희는 신의주에서 사리원을 거쳐 해주 용당포에서 밀항으로 월남하였다.
남한에서 안두희를 처음 맞이한 것은 쪼끄마한 부락 에서 월남민을 심문하던 서북청년단
이었다. 안두희는 바로 이 서북청년단 대원들의 안내로 서울로 오게 되었다.
서울에서 안두희는 자기 妻와 마찬가지로 기생 출신인 처제집에 기숙하면서 궁핍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뒤를 따라 그의 처, 장남 국영, 차녀 미라 등 가족들도 월남하
였다. 외롭고 궁핍한 안두희에게 일차 교제의 폭은 그의 처제 . 동서 등 친척과 동향 출
신의 여러 친구들이었다. 그의 동서는 일제시기 短刀로 유명한 주먹패거리 나까지마였으
며, 그의 친구는 도토리 김동식과 시라소니 이성순 등 신의주 출신의 유명한 깡패, 그리
고 신의주 상업학교 동창 신문기자 한경철 등이었다.
북한 출신의 깡패들과 가까운 안두희에게 정치적 인맥을 제공한 제1차 집단은 서북
청년단이었다. 안두희는 월남후 취직도 알아보고 李範奭의 민족청년단 등 여러 청년단체
를 찾아 가보았지만, 결국 서북청년단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선택은 당시 서북청년단 부
위원장이자 실세인 金聖柱와의 친분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안두희는 서울에 온지 석달만
에 서청에 가입하여, 서울 第一支部이며 본부 직속인 鐘路支部의 事務局長이 되었다.
당시 서북청년단은 좌익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차 반공전선에서 맹위를 떨치는 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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