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麟 민필호(閔弼鎬) 선생
1898. 2. 27(음)~1963. 4. 14
․임정수립 76주년(1919. 4)
․1921. 중국호법정부의 임정승인 기여
․1939. 년이래 임정주석 판공실장, 외무차장 의정원 의정원 의원 역임
․1963.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
우리 대한민국의 유일한 생존의 길은 우리나라가 왜 이국의 병탄(倂呑)을 당하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원인을 똑똑히 깨달아야 하고 주의사상(主義思想)이나 집권야욕(執權野慾)만 운운(云云)하는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를 앞세워 나라와 민족이 사는 것이다.
- 임시정부의 단합을 강조하면서 -(1945. 임시정부 주석 판공실장 재임시)
명문 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덕성과 재주가 뛰어나다
1898년 2월 27일(음력) 서울 호동(壺洞)에서 부친 정2품 의정부찬정(正2品 議政府贊政)시(諡) 효헌공(孝獻公)휘(諱) 치헌(致憲)과 모친 전주(全州) 이씨(李憲卿) 사이에 4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字)는 중우(仲禹), 호는 석린(石麟)이다. 이명(異名)으로 임동반(林東潘)․왕량성(王良誠)이 있다.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혁혁한 명문으로 유년시절부터 덕성과 재주가 비범하였다. 당시는 국내정세의 혼란과 밀려오는 열강들의 압력으로 나라의 형세가 기울어지고 내우 외환(內憂外患)이 닥쳐오고 있는 때였다.
선생은 11세때에 서울로 상경하여 큰형(준호 :濬鎬)이 경영하는 경신(儆新) 소학교 5학년 2학기에 입학하여 반년 후에 우등으로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여 학습하던 중 3학년때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 이듬해(1911. 4학년) 졸업을 몇달 앞두고 외국년호(外國年號)가 적힌 졸업장을 받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생각하고 동년 겨울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경술국치후 상해로 망명, 박달학원에서 신학문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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