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식(申圭植) 선생
1880. 1.13~1922. 9.25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신규식(申圭植) 선생이 한․중(韓․中)수교 시점에서 재조명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선생은 중국에서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한 숨겨진 공로자인 동시에 국력배양과 민중계몽 등 자립기반확충운동을 총체적으로 전개했기 때문이다.
신규식 선생의 43세 짧은 생애를 되새겨 본다.
신규식 선생이 남긴 명저(名著)「한국혼(韓國魂)」은 이렇게 시작된다.
「마음이 죽어버린 것 보다 더큰 슬픔이 없고, 망국(亡國)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 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 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글에 담긴 선생의 철학은 목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소신찬 행동으로 이어진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초 망국의 한을 온몸과 마음바쳐 투쟁으로 승화시킨 신규식 선생의 웅변이 지금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의 독립이 진정한 의미의 독립이라 할지라도,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책임은 누가 저야 하는 것인가.
충북 문의(文義)서 출생
신규식 선생은 1880년 1월 13일 충북 문의군(현재 淸原郡)에서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한 신용우(申龍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채호(申采浩) 신백우(申伯雨)와 함께「산동삼재(山東三才)」라고 불렸다.
17세때 신학문에 뜻을 세우고 상경, 관립한어학교를 거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무덕(武德)을 쌓게 되었다. 신동(神童)으로 불리며 한학 등 구학문에 능통하고 문학에도 탁월한 자질을 지녔지만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국력배양에 있다고 생각했다.
을사년(乙巳年) 순국기도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육군참위(參尉)로서 지방군대와 연계, 대일(對日)항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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