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여(梁振汝) 선생
(1862. 5. 11~1910. 5. 30)
1. 선정배경
일제 침략에 맞서 광주, 장성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신
선생의 순국90주기를 맞아 선정
2. 주요공적
○ 1907 전남 광주에서 거의, 의병장으로 활동
○ 1908~1909 광주, 창평, 나주, 장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
○ 1910 피체되어 교형 순국
서암(瑞菴) 양진여(梁振汝) 선생
(1862. 5. 11.~1910. 5. 30.)
무릇 왜적(倭賊)은 우리의 하늘에 사무치는 원수인 것이다. 왜적의
머리는 무슨 쇳덩이기에 우리 칼날이 들어가지 않으며, 왜적의 몸은
무슨 돌덩이기에 우리의 총탄이 박히지 않겠는가. 오늘 행하지 못하면
내일 행할 것이요, 금년에 죽이지 못하면 내년에는 기필코 죽이기로
맹서하였다.
- 선생과 같은 시기 활동한 어느 호남의병장의 격문 중에서 -
한말 의병운동은 처음 1894년 갑오왜란과 이듬해 을미년에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 그리고 단발령이라는 개화 조치에 반대하여 양반
유생층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때문에 을미의병이라고도 하는 전기 의병
운동의 주체는 양반 유생층이었고, 포수와 농민들이 병사층을 이루고
있었다. 또 발생 원인에서도 알수 있듯이 그 이념은 반(反)외세 위정
척사사상이었다. 운동 중심지도 기우만․기삼연․고광순 의병과 같은
호남지역 의병도 있었지만, 주로 기호․영남 지방 의병이 주축이었다.
운동 양상도 유인석 의병처럼 예외가 있었지만 대개의 의병부대는 전투
적이라기보다는 시위적인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을사의병인 중기 의병운동에서 달라진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