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독립운동가 홍보자료
곽재기(郭在驥) 선생
(1893.2.7~1952.1.10)
1. 선정배경
1909년 대동청년당에서 활동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을 창단하여 국내에서 암살․파괴 활동을 추진하다 옥고를 치름
2. 주요공적
○ 1909 대동청년당 가입
○ 1919 3․1운동 참여, 의열단 조직
○ 1920 식민통치기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등)
폭파 기도
곽재기(郭在驥) 선생
(1893.2.7~1952.1.10)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携手)하야
부절(不絶)하는 폭력 -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야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의열단선언」(조선혁명선언) 중에서(1923. 1)
일제가 그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전율하던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의열투쟁 방략을 구사하던 의열단(義烈團)이다. 의열단은 한국독립운동의 독특한 투쟁방략인 의열투쟁을 강력하게 실행하여 큰 성과를 냈다.
1920년부터 1923년까지 국내에서 제1차(1920. 6)․제2차(1923. 3)․제3차(1923. 12)에 걸쳐 대규모 암살․파괴 투쟁을 실행하였다. 이 사이 산발적인 의거도 병행하였는데, 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20년 9월 박재혁(朴載赫) 의사가 부산경찰서를 폭파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최수봉(崔壽鳳) 의사가 밀양경찰서를 폭파하였던 것이다.
특히 1921년 9월에는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에 투탄하여 그 일부를 파괴한 김익상(金益相) 의거가 성공을 거두었다. 김익상은 다음해 3월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까(田中義一) 일행을 오성륜(吳成崙)․이종암 등과 함께 저격한 상해 의거를 결행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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