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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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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岡 김지섭(金祉燮) 의사
1884. 7. 21~1928. 2. 20
․1922년 상해에서 의열단 가입
․1924년 일본궁성에 폭탄투척(이중교 의거)
․1928년 옥중순국(일본 천엽형무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만리창파에 한몸 맡겨 원수의 배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蜀道보다 험하고 泰나라보다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臥薪嘗膽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 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 1923년 12월 상해에서 동경으로 향하는 천성환 호에서 지은 詩-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사서삼경에 능통하다
1884년 7월 21일 경북 안동군 풍북면(豊北面) 오미동(五美洞)에서 풍산(豊山) 김씨(金氏)인 부친 김병규(金秉奎)와 모친 신천 강씨(信川康氏)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자(字)는 위경(衛卿)이고 호는 추강(秋岡),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어릴때부터 재주가 비상하고 학문에 출중하여 천재의 칭송을 받았고 일찍이 한학을 배워 사서삼경에 능통하였다. 특히 집안의 숙부되는 운재(雲齋) 김병황(金秉璜)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찍이 학문을 터득하였다.
15세에 인근 예천군 용문면 죽림동(竹林洞) 예천(醴泉)권(權)씨 가문의 권석희(權錫禧)와 혼인하였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대쪽같은 성격이 남달리 강하였으며, 이러한 성품은 훗날 조국의 독립을 되찾고자 벌인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의사는 일어를 배추기 시작한지 2개월 만에 습득하고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상주보통학교(尙州普通學校) 교원과 금산 지방법원(錦山地方法院)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의 무력과 강압에 의하여 국권이 상실되자 자신도 공직을 분연히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김원봉(金元鳳)․곽재기(廓在驥)․김시현(金始顯) 등과 시국을 담론하여 조국독립운동방략에 대하여 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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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국가보훈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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