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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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塘南 최팔용(崔八鎔) 선생
1891. 7. 13~1922. 9. 14
․1918년 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학지광』편집국장 역임
․1919년 조선청년독립단 발족 및2․8독립선언(대표 11인 중 1인)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무릇 국가 또는 민족이 멸망한다 해도 반드시 영구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 또 국가, 민족이 융성한다 해도 또한 영구히 융성하는 것은 아니다. 보라! 멸망의 길을 걷던 폴란드는 지금 독립이 되고, 이에 반해서 천하에 위엄을 자랑하던 러시아 제국은 지금 망하지 않았는가”
- 1918. 4. 13 적도 동경의 YMCA 강연회에서 -
신문명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다
1891년 7월 13일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홍원읍(洪原邑) 남당리(南塘里)에서 출생하였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어려서부터 향리 서당인 당남숙(塘南塾)에서 한문을 배웠다. 열강의 문명과 문물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당남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자 선생은 세계문명에 대한 눈을 떠 신학문을 배우고자 스무살이 되던 해인 1910년 봄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경에서 수개월 동안 머무르는 동안 조국이 일본의 무력과 강압에 의해 빼앗기게 되었다는 경술국치의 비보를 듣고 통분하여 즉시 귀국, 고향에 돌아와 강의록으로 영어와 수학 등을 독학하며 실력을 쌓았다. 그후 상경하여 오성중학교(五星中學校) 정치과에 입학하였다. 선생의 원만한 성품과 대인관계는 일본유학생 사이에서 지도적인 인물로 인정되어 존경받게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젊은이들은 국내 문제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제의 민족차별은 이들 젊은 학도들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항일의식의 정도와 수단의 차이는 있을 망정 모두가 한결같이 자주독립을 열망하는 마음은 일치하였다. 이때 선생은 일본 한인유학생 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한인유학생학우회에 가입하여 원만한 성품과 대인관계로 지도자로서 존경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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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국가보훈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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