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정부자료입니다.
|
|
|
|
海雲堂 김하락(金河洛) 선생
1846. 12. 14~1896. 7. 14
1896․연합의진 이천수창의소 구성
․백현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 대파
․남한산성 점거 후 서울진공계획 수립
․이후 비봉산 전투, 경주성 전투에서 승리
․영덕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자결 순국
우리 오백 년 예의의 나라가
개나 양같은 섬나라 오랑캐에게 먹힌단 말인가
아! 우리 민족은 과연 이 참화를 면치 못할 것인가
내가 차라리 어복(魚腹)에 장사(葬事)할지라도
도적놈들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
- 총상을 입고 강물 속으로 투신 자결하기 전 남긴 말-
선생은 1846년 12월 14일 경북 의성(義城)에서 의성 김씨 운휘(運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자(字)는 계삼(季三),호(號)는 해운당(海雲堂)이다. 출생 후 서울로 이주한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면서 천문․지리․병법․의학 등의 서적을 널리 탐독하였다.
개항 이후 내정 간섭을 일삼으며 우리 나라를 침탈하고 있던 일제가 1895년 8월 20일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견제하려던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하는 만행을 저지른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아가 일제는 친일내각으로 하여금 을미개혁을 시행케 하고, 그 일환으로 같은 해 11월 15일 단발령(斷髮令)을 강제 실시케 하였다. 이는 밖으로 개혁의 모양새를 갖추어 침략의 독수를 드러나지 않게 하면서, 안으로 한국을 반(半)식민지 체제로 개편하려는 일제의 침략 책동이었다.
이같은 민족적 수모와 국가적 위기에 당면하여 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몰아내고 국모(國母) 복수를 이루고자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평소 의기 투합하였던 이종 동생 조성학(趙成學)과 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의 동지들과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거의하기로 결정하고, 서울을 빠져 나왔다.
연합의진 이천수창의소 결성
.... |
|
|
|
|
출처:국가보훈처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