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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개항과 조선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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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興宣大院君은 朝鮮王朝의 제26대왕 高宗의 生父 李昰應을 일컫는 봉작명이며 그는 보통 大院君이라고 약칭된다. 그는 19세기 후반의 중요한 역사적 고비마다 정치무대의 전면에 나서서 ‘사실상의 섭정’을 맡아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인 평가와 비판적 평가가 양분되고 있다.
2. 대원군의 인물
사도세자가 궁녀에게서 얻은 아들 셋 중 둘째 아들이 恩信君이었다. 은신군은 후사가 없어 仁祖의 셋째 아들인 麟坪大君의 5대손 秉源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는데 바로 그가 대원군의 친부인 南延君 球였다. 대원군은 네 형제 중 막내였다. 대원군은 失勢한 왕족이긴 하지만 그 당시 얼마 안되는 왕족 가운데 혈통이 분명한 王孫이었다. 대원군이 성장기에 어떠한 교육을 받았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가 西學과 圖鑑說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여느 君王들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롭고 폭 넓은 식견과 소양을 몸에 익힌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대원군은 익히 알려진 대로, 그는 安東 金氏 勢道정치 하에서 호신책으로 市井의 무뢰한들과 어울리면서 破落戶의 생활을 하였다. 이 무렵 그는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아 宮道令이란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대원군은 이러한 자유분방한 생활경험을 통해서 浩然之氣를 기르고 동시에 庶民의 살림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백성의 여망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경험은 집권 후 그가 개혁정치를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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