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
1. 서
고려 고종 때 제유의 작이라는 <한림별곡> 제 1장 “원순문인로시공노사육 이정언진한림쌍운주필”로 알려진 진한림인 진화는 이정언인 이규보와 함께 주필로 이름난 그 시대 쌍벽의 시인이었으며, 후대에도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혀왔다. 그러나 진화는 생몰년도 확실하지 아니하고 행적도 상세히는 전하지 않는다. 진화의 시집은 고려말에 이미 간행되었던 듯하나 전하지 아니하고, 진화 사후 580여년이 지나 조선 정조 8년(1784년)에 그의 15대손인 진후가 그 당시까지 전하는 자료를 모아 편찬하여 목활자본으로 간행한 매호유고가 현재 전한다. 현재로서는 매호유고에 나타나 있는 진화의 행적이나 사회적 지위 등에 대한 단편적 내용들이 그와 관련하여서 남아있는 가장 상세한 기록이 되는 셈이다.
매호유고의 <매호공소전>에 의하면 진화는 홍주 려양현 사람으로 신종 무오년(신종1년, 1198년)에 사마시에 장원을 하였고, 2년 후인 경신년에 문과 부장원을 하여, 그 다음해에 보내시로 벼슬길에 오른다. 이때 진화는 “아직 위금[혼인]을 아니하고 나이가 채 이십이 아니 되었다”고 매호유고 부록 사실에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는 대략 1182년, 3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고, 생장기는 무인집권 직후의 혼란기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게 된 시기는 최씨 정권으로 정국이 일단 안정이 되어가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매호유고의 기록에 의하면 진화는 신종 4년(1201년) 보내시로 출사한 이래, 기사년(희종 5년, 1209년)에 학정이 되었고, 강종 때에는 조칙을 쓰는 일을 맡고, 계유년(강종 2년, 1213년)에는 언사에 연루 파면되었다가, 다시 한림원에 복직(1215년), 정언, 보궐을 거쳐 우사간으로 지공주사가 되었다가 관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그의 몰년 또한 미상이나 대략 1220년 이후일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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