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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상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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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 불교적 면모
불교는 삼국의 국가체제가 정비될 무렵에 전래되어 왔다. 씨족사회 당시에 설립되었던 巫覡信仰이나 祖上崇拜 신앙만으로는 새로운 국가의 사회 생활을 이끌어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불교가 고등종교이자 철학의 영역내의 잡다한 여러 부족의 신화와 무격신앙들을 포용하면서 국가적인 발전단계에서 야기되는 인간사회의 갈등이나 모순을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깨닫게 함으로써, 부족적인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초부족적인 국가정신의 확립에 기여하여 새로운 고대국가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불교와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원칙적으로 正法을 근본으로 삼는 敎主王從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중국불교에 있어서는 왕주교종으로 바뀌었으며, 한국불교에 와서는 이러한 경향이 한층 강화되어 국가와 불교는 완전히 유착하게 되었다. 중국불교에 있어서는 오랜 기간 동안 왕법과 불법의 대립항쟁을 거쳐 마침내 불법이 왕법 아래에 굴복하게 되었던 것에 대하여 한국의 불교는 왕법과 불법이 처음부터 일체시되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이러한 색채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신라불교였다. 왕실은 불교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국왕을 부처와 동일시하거나, 아니면 弘法의 轉輪聖王으로 보려는 眞種說話를 성립시켰다. 또 다른 예로는 화랑은 전륜성왕과 함께 하생하여 龍華樹밑에서 成道하고 이 세계를 정화하여 이상적인 불국토를 건설할 것이라고 하는 미륵불의 화신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고구려는 삼국가운데서는 가장 선진적이어서 불교수입 이전에 이미 국가성정을 보았으며, 또한 문화수준도 가장 높아서 중국의 남북조와 교류를 가질 뿐만 아니라 서역이나 중앙아시아 지역과도 폭넓은 교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불교, 특히 북조불교 일변도의 모방적 성격이나 미신적 성격을 면할 수 있었다.
백제는 토착적 기반이 약한 왕실대신에 귀족세력이 강대하여 왕법에 대하여 불법의 독립성을 내세울 수 있었다. 또 개인적 차원에서의 소승적인 戒律의 준수가 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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