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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회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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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회의 구조는 종교를 포함한 사회의 모든 영역이 유교로 통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도 역시 긴장이 심화되어서 여러 가지 불평도 나왔으나 유교의 체제로는 극복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동학의 창도도 이러한 사회 혼란을 유교에서 벗어나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동학은 급속히 전파되었고 사회 문제가 없어지지 않는 한 막을 수 없었다. 또 동학은 나라 안의 문제만 본 것이 아니었다. 이 때는 대원군의 개혁으로 조금 문제의 숨통이 트이는 시기였으나 나라 밖의 세력이 몰아닥치기 시작하였다. 만약 개항이라는 변혁을 하면 유교적 사회 체제마저 흔들릴 수 있는 유교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에 쇄국 정책을 택하였으나 결국 개화의 흐름은 몰아닥치고 말았다. 동학은 이에 대한 대응의 길로서도 마련된 것이다.
동학은 유교를 뛰어넘으면서 서학에도 버금가는 종교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 예로 동학의 신념인 인도주의적인 평등 사상을 보면 여기서는 신분제를 반대하였다. 따라서 신도가 급속히 늘어났으며 이들을 유기적으로 조직화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것이 피지배 계층의 조직적인 혁명 전쟁인 갑오 동학 농민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조직적인 대대적 무력 항쟁이었고 유교적 체제에 대항하면서 외세에 반대하는 등 새로운 종교를 기반으로 사회의 혁파를 추구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학 운동은 혁명적이었다.
사회 운동이 이룩되기 위해서는 상징화의 과정을 거쳐 동원화의 과정을 더한 뒤 사회 속에 제도화되어야 한다. 비록 동학 농민 운동은 이러한 제도화의 과정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다른 의미로서 제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아래로부터 민족주의를 이끌어 내었고 민중의 힘을 보여주었다. 또 현실을 혁파하고자 하는 창조적 긴장을 통하여 역사 변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즉 동학은 참여적 저항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학 혁명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어떻게 기억하는 지가 우리의 역사를 결정지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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