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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등소평의 실사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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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序論
불과 20여년 전부터 세계무대에 얼굴을 나타내기 시작한 중국은 이제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이라는 語句는 오늘날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지위를 아주 적실하게 표현해 주고 있는 수식어이다. 중국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항상 ‘實事求是’의 철학적 배경이 깔려있다.
여기서는 實事求是의 역사적 근거를 서술하는 동시에 毛澤東과 鄧小平의 ‘實事求是 철학’을 실천론과 모순론을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또 같은 實事求是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毛澤東의 정책이 실패한 이유와 實事求是의 원칙 하에 진행된 鄧小平의 개혁개방정책의 기본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實事求是의 역사적 근거
實事求是라는 말은 西漢의 班固라는 학자가 『한서(漢書)』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기원전 155년 西漢 景帝의 아들인 劉德이 ‘학문을 배우는데 있어서 옛것을 좋아하고, 실재 사실에 근거하여 참된 지식을 탐구하려 하였다(修學好古 實事求是)’라는 칭찬을 받았다고 漢書에 기록된 것이 實事求是의 기원이다. 이때의 實事求是는 “실재의 사실과 논증에 근거하여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을 가리킨다.1)1) 姜春華, “중국의 개혁․개방과 ‘實事求是’철학,” 「중국연구」1, (서울 : 대륙연구소, 1993. 창간호), pp.150-151.
그러나 당시의 實事求是는 經書의 탐구와 역사서술에 그쳤으므로 역사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 實事求是가 학풍의 대명사로 출현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기이다. 당시에는 고증학의 출현에 의해 實事求是가 학풍으로 형성되었다. 이때의 實事求是란 “사실은 반드시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하고, 말은 반드시 근원이 있어야 하며, 근거없이 짐작하여 결단을 내리는 것은 취할 바 못된다”는 것이다.2)2) 上揭書, p.151.
그러나 역시 이 시기의 實事求是도 경전연구와 고적의 탐구에 그쳤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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