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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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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洪吉童傳) - 허 균
작품 형성 배경을 먼저 살펴보겠다.
조선은 건국과 더불어 주자학을 국가 통치의 근간으로 삼아서 삼강오륜을 교육의 기초로 하였기 때문에 군주나 부모에 거역하는 범죄는 일어나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정치적인 문제로서 세조의 왕위 찬탈과 사육신의 절사 등등의 사태는 민심을 많이 흩어지게 하였고, 국가 통치의 기강을 흩어지게 했고, 지방에서는 떼를 지어 행동하는 군도들이 횡행했고, 연산군 6년 가을에 체포된 도적 홍길동의 사건이 가장 널리 알려진 떼강도 사건이었다. 떼를 지어 도적질을 하는 사건은 홍길동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안정되지 못한 사회적 질서 속에서 임진왜란이란 엄청난 전란이 일어나 사람들의 가치 판단 기준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노비로 있던 사람이 전쟁의 와중에서 출세를 하게 되고, 권세 있던 가문이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다. 명령 계통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늘어갔고, 여기에 더하여 지방 관장의 수탈은 도를 더해갔던 것이다.
선조 말년부터 서양갑, 심우영 등의 무리는 서자 출신의 집단으로서 자신들의 권익 쟁취를 위하여 상소도 하고 집단행동도 하면서 세인의 주목을 끌다가 급기야 광해군 5년에는 역모의 죄명으로 처형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는 건국 초기부터 정처를 한 사람만 인정함과 동시에, 정처 소생이 아닌 서얼들에게는 과거시험의 응시를 제한하고 상위 직책의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도록 하는 법령에 제정되었기 때문에,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이들의 저항은 실로 위험수위에 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 혼란을 틈타 신출귀몰하는 무리 도적들의 행동과, 또한 임란을 거치면서 알려진 의병, 승병들의 활약상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동안, 자연히 초능력적 활약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이것은 과도기적 산물인 신선사상의 도술 행각과 접맥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방외사상의 번성은 이적 중심의 도술 이야기를 양산하게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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