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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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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님의 침묵’
1910년 8월29일 한일병탄'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를 공식화한 일제는 식민지배를 공고히하기 위한 각종 조처를 착착 밟아나갔다. 총독부에서 헌병 및 경찰로 이어지는 행정적․무력적 기반 마련, 항일의병전쟁에 대한 강력한 토벌작전, 신문지법과 출판법, 조선교육령 등의 법제적 장치를 통한 언론 및 교육의 통제, 그리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식민지적 농업구조의 형성을 거치면서 일본의 식민지배는 안정궤도에 올라선 것처럼 보였다.
무단정치'(武斷政治)로 규정할 만한 일제의 식민통치는 그러나 조선민중의 거센 반발에 부닥치게 된다. 일찍이 동학농민전쟁과 의병투쟁 등을 통해 외세를 물리치기 위한 검질긴 투쟁의 전통을 쌓아온 조선인들은 1919년 1월21일 급서한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에 흥분하고, 그해 2월8일 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발표에 고무받아 전국적인 규모의 항일시위에 나선다. 3․1만세운동이다. 그 만세운동의 한가운데에 만해 한용운이 있었다.
만해는 3․1운동의 계획과 준비 단계에서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거사 당일에는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의 앞에 서서 독립투쟁의 의지를 다짐하는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도했다. 거사 직전 다른 민족대표들에게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 3대 행동원칙을 제시한 그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이냐는 일본인 판사의 질문에 대해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또한 옥에 갇힌 민족대표들 사이에 자신들이 극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그들 중 일부가 불안과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분뇨통을 그들에게 던지며 나약함에 대해 일갈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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