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신채호가 ‘1천년래 제1대 사건’으로 꼽는 것은
서경 전쟁의 양쪽 병력이 각각 수만에 불과하며, 전투의 처음과 끝이 2년에 못 미치지만, 그 전쟁의 결과가 조선 사회에 영향을 끼침은 서경 전쟁 이전에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의 전쟁 보다도, 서경 전쟁 이후 고려 대 몽고의 60년 전쟁보다도 몇 갑절이나 더 두드러졌으니, 대개 고려부터 조선까지 1천년 간에 서경 전역보다 더한 큰 사건이 없을 것이다. 서경 전쟁을 역대의 역사가들은 다만 왕의 군대가 반역의 무리를 친 전쟁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그 실상은 이 전쟁이, 즉 낭가와 불가의 양가 대 유가의 전쟁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전쟁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전쟁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전쟁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 『동아일보』, 1925년 연재)
단재 신채호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평가한 대목이다. 그 뒤로도 여러 학자들이 단재의 평가를 따랐다. 그렇다면 ‘조선 1천년간 제1대 사건’의 실상은 어떠했나
승려 출신 묘청은 서경 사람이었다. 그는 인종 6년에 일관(천문담당 관리) 백수한, 기거주(임금 주변의 일을 기록하는 관리) 정지상 등과 함께 서경 천도 운동의 뜻을 세웠다. 수도(송도)는 이미 운이 다하고 궁궐마저 타서 없어졌으나, 서경(평양)은 왕기가 있으므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뒤 무관 최봉심이란 자가 어느날 왕에게 “폐하가 삼한(고려전기까지 우리나라를 가리치던 말)을 태평하게 다스리고자 한다면 서경의 세 성인을 내놓고는 함께 알힐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세 성인이란 묘청, 백수한, 정지상을 가리켰다. 최봉심은 묘청을 국사로 삼자며 여러 관리들의 서명을 받아 왕에게 진언하여 결국 왕의 승낙을 얻어 내었다. 대귀족 세력인 이자겸과 척준경의 난이 진압된 직후였기 때문에 국왕도 새로운 세력을 가까이에 두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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