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본문요약
엄숙한 지성 조지훈론
조지훈은 광복 이후 작고할 때까지 줄곧 서울 성북동에서 기거했고 글을 쓰다가 상(想)이 잡히지 않으면 곧잘 산보를 나가곤 했다. 외양으로 보아 느껴지는 그 우람한 기골(氣骨)과는 달리 그는 하찮은 잡문 한 편을 쓰기 위해서도 며칠씩 남모르게 앓는 것이 상례였다.
지훈을 가리켜 흔히 시인이라고 한다. 물론 그가 우리 세대에 있어서 단연 제일급 시인이었음은 틀림없으나, 그는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고, 인생을 화사하게 구가한 그런 시인이 아니었다. 그가 살다 간 조국의 현실이 그러했던 것처럼, 특히 그의 후기 시는 뼈아픈 민족의 비극을 몸소 극복하려는 장렬한 양심의 절규로 얼룩져 있다. 지훈을 가리켜 또 학자라고 한다. 그러나, 이제 학자로서의 지훈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는 연구실에만 들어앉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오불관언(吾不關焉)하고, 고고하게 오로지 자기의 학문 세계에만 안주하려는 그런 학자도 아니었다. 또 지훈을 가리켜 논객(論客)이요, 지사(志士)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의 추상같은 논박과 질책이 결코 어느 정당이나 특정 계층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함이 아니요, 항상 민중의 편에 서서 이 민족 전체의 생존․번영을 터뜨린 엄숙한 지성의 분노일진대, 이를 일러 어찌 요즘 시정(市井)에서 흔히 말하는 논객․지사와 날을 같이하여 거론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훈의 진면목은 시인, 학자, 논객, 문필인을 종합한 전통적인 한국의 선비상(象)에 있는 것이다. 굳이 현대말로 부른다면 우리 세대를 대표할 만한 참다운 <지성인>이었다고나 할까
지훈 조동탁(趙東卓), 그는 일찍이 영남(嶺南) 명문가(名文家)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발군의 시재(詩才)를 보였고, 조(祖)․부(父)로부터 절의(節義)를 생명보다 귀히 여기는 선비정신을 익히며 자랐다. 아마 그의 평생의 파란 많은 역정이 이미 이에서 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