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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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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생애
윤동주는 망명지에서 태어나 생애의 전부를 타향에서 보낸 사람이다. 그리고, 짧은 생애의 죽음 마저도 적지 일본의 감옥에서 맞이 하였으며 백골마저 망명지 간도에 묻혀있는 시인, 그가 바로 윤동주이다.
그는 부정의 현실, 위압의 현실에 순정의 자아만으로 응전해간 사람이 윤동주이다. 순정의 자아만으로 그가 설정한 절대적양심에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해 간 사람이 윤동주였단 것이다. 지사도 투사도 아니 채 아픔속으로 자신을 몰아가변서 쯚임없이 아픔의 먹이가 되고 있는 사람-- 그래서 이른바 비극적 황홀이 광채로 살아 있는 시를 남기고 간 사람이 윤동주인 것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극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 파평인 윤영석과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선생의 누이 김용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촌이 농촌이기는 하지만 1900년애 들어 선각자들이 이주해 들어오면서 종교와 교육, 그리고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특히 1890년 회령에서 이주해 온 김약연 선생은 청국인에게서 땅을 구입하여 조선인 마을을 형성하고 명동서숙을 거쳐 명동 소학교와 명동 중학교를 설립, 발전시켰다. 이들 학교는 고향산천을 버리고 쫓겨온 조선인들에세 민족혼을 일깨워 줄 수 있는 교육 운동의 보금자리였다.
규암 깁약연 선생이 선비로서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면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실질적인 면에서 매사를 추진하고 집안 교회 그리고 마을 일가지도 원만하게 이끌어 가는 인품을 지니신 분이었다. 이럼 관계로 해서 두 분의 사이는 매우 밀착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규암 선생의 누이인 김용과 윤동주의 아버지가 혼례를 올리게 된 일은 매우 자연스런일이라 할 것이다.
당시 윤동주의 아버지 나이가 16세, 어머니의 나이가 20세였다. 이렇게 해서간도 명동촌의 두 선각 집안의 혈통이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 그리고 1917년 12월 30일에 윤동주가 태어났다. 윤동주의 위로 딸이 둘 있었으나 나이 어려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윤동주는 윤씨 집안의 장남인 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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