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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협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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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협상운동
Ⅰ. 남북협상운동의 배경
1. 좌우합작운동 실패이후 각정치세력의 입장과 남북협상론 대두
좌우합작운동이 47년 7월 19일 여운형의 암살과 제 2차 미소공위의 사실상 결렬과 한반도 문제의 유엔이관의 과정에 따라 47년 12월 6일 발전적인 해체되자 중도좌파의 민족주의세력은 대부분 극좌의 공산주의세력에 합류하엿으며 극좌파들은 냉전이 심화됨에 따라 더욱 결속하여 북한정권의 적극적 영향과 소련의 지원하에서 공산혁명의 폭력적 전7술을 노골화 시켰다. 한편 이에 대비하여 남한의 보수우익진영은 이승만, 한민당 등 극우파세력이 주장하는 단정론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임정의 김구계를 비롯한 우파의 민족주의자들은 단정론을 비판하고 남북협상론을 제기하였다. 남한에서 우파 민족주의세력의 중추적 지도자인 김구, 김규식 등이 중심이 되어 남북협상론을 주장하게 된 것은 이승만이 일찍이 1946년 6월 3일 정읍발언에서 단정수립을 주장한 데 자극을 받았으며 아울러 1947년 5월 21일 재개된 제2차 미소공위도 7월 2일에 이르러 다시 교착상태에 빠지자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는 등 일련의 사태진전과 조치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2. 좌우합작운동 실패후 국내외상황변동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이라는 미국의 대한반도정책변화는 국대의 단정론과 사실상 연계된 것으로 이는 당시 국제관계에세의 냉전체제 심화의 한 소산물이었다. 미 국무장관 마샬은 1947년 9월 17일 유엔총회 제 2차 회의 개회연설에서 한국독립문데에 관한 대한정책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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