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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국정치론] ‘자유주의[自由主義]’와 ‘천안문[天安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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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自由主義)’와 ‘천안문(天安門)’ 사건
Ⅰ 시대적(時代的) 배경(背景)
❏ 오늘날 중국의 보수적(保守的) 지도자들에 의하여 ‘동란(動亂)’으로 규정되고 있는 1989년 천안문사건은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그것은 등소평도 인정한 것처럼 ‘국제적 대기류와 국내적 소기류가 합치된’ 사건이며, ‘반드시 올 것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등소평이 말하는 국제적 대기류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촉발된 사회주의권의 변혁(變革)운동과 서방세계의 이른바 ‘화평연변’, 즉 평화적 방식으로 사회주의체제의 변질을 획핵하는 외부의 압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국내적 소기류란 개혁개방정책 과정에서 제기되고 있는 자유화와 민주화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천안문사건이란 지난 10여 년간 등소평이 주도한 개혁과 개방정책의 산물(産物)이라고 할 수 있다.
❏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의 결과로 중국경제의 규모는 엄청나게 증대되었지만, 다양한 경제주체가 등장하면서 과거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계층간, 지역간의 경제적 격차가 발생하여 사외적인 긴장과 갈등을 증폭시켰다. 이는 공동체의 동질성이 약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장했다.
Ⅱ 이 논쟁에서 주요 인물의 생애(生涯)
보 수 적
개 혁 적
등소평, 이붕
방려지, 왕약망, 유빈안, 소소지, 엄가기, 포준신, 왕단, 능염,
조자양(양자간의 대화 추진)
‣ 자오쯔양 [趙紫陽(조자양), 1919.10.17 ~ 2005.1.17]
❏ 1967년 문화대혁명으로 비판·숙청되었다가 1971년 복권, 1973년 중국공산당 제10기 중앙위원, 1975년 쓰촨성(四川省) 당위원회 제1서기, 혁명위원회 주임, 청두(成都)부대 제1정치위원이 되어 농업진흥과 기업자주권을 확대시켜 현저한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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