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칼’ 역사 속遷都
“王權 강화의 정치개혁이자
집권 기반의 재편성 과정”
한 나라의 수도를 정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하는 경우든, 도읍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경우든 고려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먼 옛날로 올라갈수록 수도가 지니는 의미는 각별했다.
삼국시대의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비교해 보면, 고구려와 백제가 몇 차례 천도했던 것과 달리 신라는 1,000년에 이르는 기간에 전혀 도읍을 옮기지 않았다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뒷날 백제의 영토 전체와 고구려의 영토 일부를 차지해 영역이 크게 확대됨으로써 서라벌이 국토의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었음에도 신라는 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이는 우연히 생겨난 것일까. 신라는 왜1,000년이 지나도록 천도하지 않았을까.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수도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일찍부터 중앙집권 체제가 발달했던 우리 역사에서 수도는 또한 사회와 경제 및 문화의 중심지였다. 여기에 더해 전근대 사회의 대부분의 기간 수도는 지배층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양반의 다수가 향촌에 거주하는 변화가 생겼지만,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귀족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수도에서 생활했다. 고려시대에는 귀족이 개경에 거주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이자 특권이었다. 개경에 저택을 두고 생활하는 것이 곧 왕실을 호위하는 것으로 간주됐고, 고향으로 내려보내는 것은 왕실을 옹호하는 자격의 박탈과 귀족사회 안에서의 유대관계 단절을 가져오는 일종의 형벌이었다.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 고대사회로 가면, 수도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지배신분임을 입증하는 증명서였다. 왕경인(王京人)인가, 지방민인가의 구별이 사회 신분을 구분하는 기본적 지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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