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의 동방원정
페르시아 원정의 시작
왕위에 오를 때부터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결심하고 있었다. 그는 성장하는 동안 늘그 목표를 염두에 두었으며 더욱이 필리포스가 창건한 군대를 유지하고 자신이 빚진 500탈렌트를 갚기 위해서는 페르시아의 부가 필요했다.
그리스 원정군인 만인대(萬人隊)와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가 페르시아 영토 내에서 성공적인 원정을 벌임으로써 페르시아 제국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알렉산더는 기병대 병력만 충분히 있으면 어떤 페르시아 군대라도 물리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다.
BC 334년 봄에 그는 이미 아버지 때부터 충성해온 안티파트로스를 1만 3,000명이 넘는 병력과 함께 자기 대리인으로 유럽에 남겨두고 다르다넬스(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다. 그는 보병 약 3만 명과 기병 5,000여 명(그 가운데 1만 4,000명가량이 마케도니아인이었음), 그리고 그리스 동맹에서 파견한 7,000명가량의 연합군을 직접 지휘했다. 원정군은 측량사·기술자·건축가·과학자·궁정관리·역사가 들을 대동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처음부터 무제한 원정을 벌일 생각이었던 것 같다.
호메로스에게서 영감을 얻은 낭만적인 행동으로 일리움(트로이)을 방문한 이후 그는 마르마라 해 부근의 그라니코스(지금의 코카바스) 강에서 사트라프 3명이 이끄는 페르시아군과 최초로 마주쳤다(BC 334.)페르시아군의 계획은 알렉산더가 강을 건너도록 유인하여 육박전으로 그를 살해하는 것이었는데 이 계획이 거의 성공을 거둘 뻔했으나 페르시아군의 전열이 깨지는 바람에 알렉산드로스의 승리가 확정되었다.다리우스 수하의 많은 그리스 용병들이 학살당했으며 2,000명의 생존자들은 사슬에 묶여 마케도니아로 송환되었다.이 승리로 소아시아 서부가 마케도니아군에게 노출되었고 대부분의 도시들은 자진해서 서둘러 성문을 열었다.
참주들은 추방되었고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가 시행한 정책과는 대조적으로 민주주의가 자리잡았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는 장차 자신이 취할 범(汎)헬레니즘 정책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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