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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개혁과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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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개혁과 좌절
조선시대 역대의 군주들 속에서 특별히 세종과 정조에게 문화군주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세종은 왕조체제가 안정기를 누릴 때 여러 문화적 업적을 이룩했다. 이와 달리 정조는 조선후기 왕조체제가 흔들릴 때 이를 수습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안고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정조는 세손으로 있을 때 자신을 지지하는 시파와 자신을 반대하는 벽파 사이에서 여러모로 시달림을 받았다. 이런 몇 가지 조건으로 정조는 세종과는 달리 수난의 역정을 걸었다. 정조는 흩어지는 민심을 수습하고 묵은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정조는 1776년 왕위에 올랐다. 그는 늘 검소한 생활을 했다. 평상복은 무명으로 지어 입었고 해어지면 기워 입었으며 수라상의 반찬은 다섯가지쯤으로 제한했다. 쇠고기 따위의 고급 음식은 되도록 올리지 못하게 했다. 또 화려한 자기 따위를 방 안에 벌여놓지 않았다. 스스로 백성과 벼슬아치들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뒤맨 먼저 궁녀의 수를 줄였다. 궁녀는 일종의 궁중 노예였다. 그들 중 일부는 정5품까지 승진을 할수 있었다. 물론 결혼할 수도 없었다. 보수는 하급인 무수리의 경우를 보더라도 한 달에 쌀 4말, 한 해에 명주와 무명 각한 필씩을 받았으며 때로 특별 하사품을 받았다.
이를 보아도 궁녀들의 보수가 만만치 않음을 알수 있다. 대체로 궁녀의 수는 500명 또는 600여명을 헤아렸다. 임금이 있는 대전에는 적어도 100여명이 복무하고 있었다. 정조가 궁녀를 없애려 하자, 할머니인 정순대비가 완강하게 반대했다. 첫 시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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