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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역사와 문화 (20세기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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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역사와 문화 (20세기 프랑스)
◎ 양차대전과 프랑스
프랑스의 경제사회적 위기와 루르점령 (1923년)
1차대전을 통해 가장 큰 전화를 입은 나라는 프랑스다. 규모는 영국보다 1.5배가 컷고 130억달러의 피해를 입었다. 특히 프랑스가 제정 러시아에 투자한 차관은 러시아혁명으로 인하여 상환능력이 없엇다. 또한 프랑스는 미국의 최대 채무국으로 전락되었다. *전후의 프랑스의 대독강경책은 당연한 국내적인 배경이 되었고, 경제적, 전략적입장에서 독일이 프랑스에 무조건 배상하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전후 독일의 지불능력 마비상태는 프랑화의 폭락에 악영향을 주었고 만성적인 악성인플레이션의 중요요인이 되었다.
프랑스는 대전이후 총선거(영국과 비슷한 카아키선거를 통한 국민감정에 호소한 선거)를 통해 공화파 우익세력이 압승하였다. 따라서 연립내각의 구성으로 사회 공산세력은 후퇴하였다. 프랑스의 의회는 당시 군복의회라 칭하였다. 왜냐하면 하원의원 대다수가 퇴역장성 또는 군인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공화파 밀르랑 내각은 정부와 독점자본가의 결탁을 지지하면서 부정부패에 휘말려 정국이 불란하엿다. 독점자본가를 포함한 우익세력은 노동운동의 탄압과 프랑스군의 루르점령등 강화된 대외정책을 정부에 요청하였다. 이후 밀르랑은 대통령으로 자리를 바꾸고 Briand 부리앙 내각이 탄생하였다. 정부는 대독강경책을 고수하면서도, 부리앙의 의도는 배상문제의 신속한 타결만이 국민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프랑스는 루르점령을 강행하여 배상문제를 시급히 자국에 유리하도록 연합국에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반대로 영국과 미국은 독일 배상지불 능력을 고려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프랑스는 칸느회담에서 유럽안보 및 군비축소문제로 영국과 대립하였다. 영국은 전통적 세력균형의 입장을 고수하여 프랑스의 독주를 결코 방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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