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신해혁명전후의시대적배경
|
|
|
|
[신해혁명 전후의 시대적 배경]
1) 의화단 사건 전후의 수구파와 양무파
20세기를 여는 1900년은 청일전쟁 이후 격화된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배경으로 의화단의 활동이 증대하면서, 천진․북경 지방으로 이동한 의화단이 민족주의적 정서에 기초하지만 무모한 측면이 없지 않은 반 서양폭동을 전개하여 북중국이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던 때였다. 의화단에 대한 조정의 대책은 강경 대처와 달래기를 왔다갔다했다. 그러나 유폐된 광서제를 폐위시키려는 서태후 등 수구파의 의도가 열강의 반대로 무산되고, 수구파의 조작으로 판명되었지만 광서제의 정권복귀 소문을 확인한다는, 따라서 광서제의 정권복귀를 은연중 요구하는 열강의 ‘귀정조회(歸政照會)’가 서태후를 자극하는 등의 사태진전으로 청조는 결국 의화단을 지원하여 열강과의 전쟁도 불사하는 강경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방침의 선택은 서태후와 황제의 알려보다 무술 정변 이후 조정을 지배한 수구적 분위기가 더 중요한 배경이었다. 심복인 영록은 무술정변 당시 직예총독으로서 원세개의 신건육군(新建陸軍), 동복상(董福祥)의 감군(甘軍), 섭사성(攝士成)의 무의군(武毅軍)을 북경 주위에 배치하여 정변을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로 군기대신에 임명되고 서태후로부터 군사전권을 위임받았다. 광서제의 사촌인 단왕 재의(端王載猗)는 비밀을 고해 준 공으로 정변 뒤에 신호영(神虎營)을 장악하였는데, 곧 자신의 아들을 황위계승자로 세우면서 영록을 누르는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이와 함께 수구파 관료인 유록(裕祿)이 직예총독, 만주 팔기출신의 강의(剛毅)가 형부상서에서 병부상서, 조서교(趙舒翹)가 변법에 동정적이었던 요수항(廖壽恒)을 대신해 형부상서 겸 총리아문 대신이 되었다.
.... |
|
|
|
|
|
|
|
|
|
|
|
|
|
|
|
|